김○○ 씨. 그를 처음 본 것은 영등포공원에서이다. 벤치에 앉아 겨울 햇빛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묵은 때가 덕지덕지 묻은 롱코트를 입고 털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었다. 어떤 곳은 묵은 때로 반질반질 빛이 난다. 그 사이로 빠끔히 보이는 얼굴. 세수를 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를 정도로 시커멓다. 남루하기 짝이 없다.
다가가 인사를 하였다. 눈을 부스스 떤다. 누군데 단잠을 방해하는가 하는 투다. 다시 나를 소개하며 인사를 했다. 다소 경계를 풀며 그도 인사를 한다. 옹달샘을 아느냐고 물었다. 안다고 했다. 한두 번 이용을 한 적이 있다 한다. 그런데 왜 옹달샘에 들어가지 않고 여기서 시간을 보내느냐고 물었다. 사람을 만나 부닥치는 것이 부담스럽고 싫단다. 그래서 조금 불편하고 힘이 들지만, 밖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머리를 다쳐 조금 전의 일도 곧잘 잊는다고 했다. 까마득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방금 보았던 사람인데,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대하니 자신을 보는 주변 사람들이 가끔 당황을 한단다.(문득 ‘내 머리 속의 지우개’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그러면서 그가 들려주는 사연은 이랬다. 젊은 시절, 군 입대를 하여 군에 못을 박고 생활을 하면서 한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살다 이혼을 했다. 부인에게 남자가 생긴 것이다. 직업군인으로 생활하면서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고, 부인도 술집작부 출신이라 그런 조짐은 일찌감치 있었다. 그래도 가정을 지켜보려고 했으나 부인이 먼저 이혼을 요구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시작한 것이 부동산중개업이다. 부동산중개업이라고 하지만, 복부인을 등에 업고 경매나 공매에서 입찰을 따내어 돈을 버는 일이었다.
그 날도 공매 입찰을 따내고 나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일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벅치기를 당한 것 같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옮겨간 곳이 서울과 경기도 경계선에 있는 노숙인 쉼터였다. 그곳에서 봉투 붙이기 작업을 하며 생활을 하며 조금씩 기억을 찾아갔다. 웬만큼 회복었다 싶어 그곳을 떠나 무작정 영등포로 흘러들었다. ○○교회의 소개를 받아 쪽방에서 생활을 하며 돈도 웬만큼 벌었다. 그러다가 다시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었다.
지금은 조금씩 기억을 되찾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것을 위해서 신문을 읽는다고 했다. 신문 기사를 읽으며 기억력 훈련을 한다고 했다. 나를 알아보는 것도 몇 번 만나고 난 뒤였다. 처음에는 기억을 잘 못했다. 어제 본 것은 어렴풋이 기억을 하는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내가 누구인지 기억을 못했다. 그래서 몇 번이나 나를 확인시키며 기억케 했다. 몇 번 만나고 난 뒤부터는 그가 먼저 인사를 했다.
어느 날이었다. 한 노숙인이 방을 얻었다 하면서 계약서를 들고 와 자문을 구했다. 그는 해박한 지식으로 이런저런 질문에 답을 했다. 기억을 잃긴 했지만, 그가 공인중계사인 것은 분명했다.
그에게 생계급여(기초생활보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거절을 했다.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한다. 기억을 되찾고 직업을 얻으면 생계급여를 포기하면 되지 않느냐 하니, 자식들이 있단다. 부인과 함께 살고 있는데 그들에게 지금 형편을 알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중에 떳떳하게 나서고 싶다고 한다.
그 이후 나는 그에게 신문을 배달하는 배달원 역할을 충실히 했다. 백화점에 들러 신문을 가지고 공원으로 가서 그를 만나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막 봄이 시작되는 시절이었다. 어디로 간 것일까. 봄과 함께 다른 곳으로 노숙 장소를 옮긴 것일까. 아니면 기억을 되찾고 자기 자리로 돌아간 것일까.(그러면 얼마나 좋으랴!) 그가 어디에 있든 건강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