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노숙인 삶에 피는 '희망의 인문학'   2009-03-25 08:28:22 - written by 관리자
고단한 노숙인 삶에 피는 '희망의 인문학'
시(市), 저소득층 대상 철학·문학 등 강좌
변희원 기자 nastyb82@chosun.com  

8년간 서울역과 을지로 일대에서 노숙 생활을 했던 A(43)씨는 지난해부터 일자리를 찾아다니고 있다. 그는 고교 중퇴 후 다니던 의료기기 업체가 망한 뒤 그대로 거리에 나앉았고,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와도 연락을 끊었다. 노숙인 센터를 드나들며 끼니를 때우던 그는 지난해 3월부터 서울시가 마련한 노숙인과 저소득층을 위한 인문학 강좌 '휴먼서울 시민 인문학 코스'를 들었다.

A씨는 6개월짜리 수업을 한 번도 빼먹지 않았고 지난해 12월 졸업식도 치렀다. 그는 요즘 공공근로를 하면서 두 달에 한 번씩 어머니를 찾아간다. "인문학 강좌를 통해 알게 된 국악을 들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고 그는 말했다.

인문학을 배우려는 'A씨의 후배'들이 25일 서울시립대에서 두 번째 '서울시, 희망의 인문학 강좌' 입학식을 갖는다. 올해 수강생은 1508명으로 지난해(313명)보다 5배 가까이 늘어났다. 문학·철학·예술은 배부른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국판 '클레멘트 코스'

시가 노숙인과 저소득층을 위해 운영하는 인문학 강좌는 지난해 3월 경희대에서 처음 개강했다. 노숙인 쉼터나 상담보호센터 생활자 중 자립 의지가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철학·문학·역사 같은 인문학 중심 강좌를 열고, 창업·가정경제 등 자활에 도움이 될 실무도 함께 가르친다. 저명인사와 작가가 특강을 하거나 문화·예술 공연관람을 하는 기회도 갖는다. 한국판 '클레멘트 코스'인 것이다.

클레멘트 코스는 노숙인·빈민·죄수 등을 대상으로 정규 대학 수준의 인문학을 가르치기 위해 미국 언론인 겸 사회학자 얼 쇼리스(Shorris)가 1995년에 만들었다. 가난한 이들은 중산층이 흔히 즐길 수 있는 연주회·공연·박물관·강연을 접하는 것 자체가 힘들고, 그렇기 때문에 깊이 있게 사고하고 현명하게 판단하는 법을 몰라 가난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다는 데 착안한 것이다.

당시 끝까지 강의를 들었던 수강생 17명은 대학에 진학하거나 취직에 성공했다. 클레멘트 코스는 캐나다·멕시코·호주 등 전세계 6개 나라, 57개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다.

쇼리스는 저서 '희망의 인문학'에서 "인문학은 빈자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의지를 심어준다"고 주장한다. 인문학이 공공근로와 같은 사회적 일자리나 빈민을 위한 소액대출 제도처럼 경제적인 측면에서 직접 도움을 주지는 않지만, 노숙인과 빈민들로 하여금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갖게 해줌으로써 직업 훈련의 효과를 준다는 것이다.

◆"배려·절제의 소중함 배워"

지난해 입학생 313명 중 209명이 인문학 강좌를 수료했다. 장기간 노숙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6개월간 이어지는 수업을 받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감안할 때, 수료율 66.7%는 결코 낮지 않다고 시는 설명했다. 나머지 94명은 건강이나 일자리 문제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게 됐다고 한다.

강좌를 수료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인문학 강좌는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10년 넘게 노숙생활을 했던 B(42)씨는 밥을 먹기 위해 노숙인 자활센터에 왔다가 "도대체 교수들이 노숙인을 데리고 무슨 교육을 할까" 하는 호기심에서 강좌를 신청했다. "마음에 안 들면 때려치우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수업에 임했던 그는 단 한 번 결석 없이 강좌를 수료했다. B씨는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주변을 돌아볼 시간이 많았던 작문시간이 가장 좋았다"고 한다.

이모(56)씨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강좌를 듣는다. 그는 "시·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잠자리와 먹을 것 말고 다른 것도 생각할 여유를 갖게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10년 가까이 떨어져 사는 아들·딸들에게 편지를 자주 썼던 작문시간이 가장 인상 깊다"고 했다.

서울시가 이 강좌 수료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복수응답 가능)에서 49%가 "사회에 대한 불만이 줄어들고 사회에 대해 이해심을 갖게 됐다", 32.9%가 "정치·경제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답했다. "타인을 배려하고 절제하는 등 개인성격에 변화가 왔다"고 답한 비율은 34.3%였다.

수료생들은 지난해 12월20일 학사모를 쓰고 졸업가운을 입은 채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총장으로부터 졸업장을 받았다. 이들이 쓴 글을 모은 책 '희망으로 가는 글쓰기'는 지난 1월 출간됐다.


▲ 지난해 12월 20일 서울 경희대 평화의전당에서 열린‘휴먼 서울 시민,
인문학 코스’ 졸업식 광경.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 수료생 209명이
학사모와 졸업가운 차림으로 조인원 경희대 총장으로부터 졸업장을 받았다.
/서울시 제공


◆수강생 313명에서 1508명으로 늘어

올해 강좌의 이름은 '서울시, 희망의 인문학 강좌'다. 수강생이 폭증해 강좌 규모도 커졌다. 지난해 강좌를 열었던 경희대를 포함해, 서울시립대·동국대·성공회대 등 4개 대학이 노숙인 시설에 직접 찾아가 수업을 한다. 입학식은 3월 중 각 대학 강당에서 열리며, 1차 강좌는 3~9월, 2차는 5~11월 운영된다.

올해도 철학·문학·역사 등 인문학을 1주일에 2차례씩 2시간 동안 가르치며, 한 달에 한 번씩 자립지원 프로그램을 연다. 지난해 음악·미술 등 문화 수업의 인기가 높았던 점을 감안해 문화공연 관람도 세 차례 정도 가질 계획이라고 시는 밝혔다.

26일 동국대에서 열리는 입학식에 참석하는 '신입생' 김모(55)씨는 "오랜만에 학교에 가게 돼 설레고 기대되지만,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걱정도 든다. 만약 무사히 강좌를 수료한다면 4년간 못 본 가족들에게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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